일본 어디를 가도 볼 수 있는 화려한 간판이 있으니 이름하여 파친코(パチンコ).
'빠찡꼬'라 불리며 카지노의 또 다른 이름으로 오해받기도 했던 일본의 국민 오락 시설입니다.
대도시 어느 골목이든, 사람 좀 모인다 싶으면 빠지지 않고 그 화려한 폼새를 하고 앉아 있는 파친코.
시골 마을 논두렁을 끼고 세워진 파친코도 한두군데가 아닙니다.
유의 요란한 네온싸인 간판과 사람이 드나들며 이따금씩 문이 열리면
그 안에서 쏟아져 나오는 쏴아~ 쏴아~ 쇠구슬 마찰음.
도박이다 오락이다 이 말 많은 시설은 2007년 말 기준 일본 전국 17,000여 업소,
년간 매출액 약 29조 50억엔 우리 돈 약 400조원, 종사자수 44만명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산업입니다.
통계 주체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파친코를 즐기는 인구를 적게는 1,700만명,
많게는 3,500만명까지 보기도 합니다.
<파친코 매거진>, <필승 파친코 팬>, <파친코 필승 가이드> 등 파친코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단행본과 잡지만도 십수종이며 이 중에는 발행부수 200만부를 넘기는 책도 있습니다.
인터넷에는 각종 동호회와 연구회가 넘쳐 나고 온갖 형태로 공략법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파친코 공략법과 확률을 다루는 TV 프로그램도 있으며 파친코만을 드나들며 벌어 먹고 사는
이른바 ‘파치 프로(파친코 프로페셔녈의 일본식 줄임 말)’들도 넘쳐 납니다.
<파친코>
개인적으로 일본 파친코를 둘러 싼 가장 충격적인 2가지는
일본사회당을 이끈 도이타카코(土井多賀子) 전 위원장의 파친코 애호론과
매일 오전 10시경 파친코 앞에 길게 늘어선 줄입니다.
통상 오전 10시부터 오후 10시까지 영업을 하는 일본 파친코.
오전 10시 파친코가 문을 열기 직전 그 앞을 지나다 보면 의례히 길게 늘어 선 행렬을 보게 됩니다.
가게마다 적게는 수백대, 많게는 천여대 가까운 기계들을 갖춘 파친코.
그렇게 자리도 많은데, 뭐하러 벌써부터 줄을 서나 싶지만 지난 밤 그 가게에서
나름의 데이터를 수집한 이들이 문을 열자마자 자신이 찜해 둔 기계로 달려가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눈에야 그냥 똑 같이 보이지만 파친코 기계 상단에는 그 기계의 확률을 표기한 계기판이 있는데,
전날 아타리(あたり)라 부르는 파친코식 잭팟이 터지지 않은 기계들을 미리 기억해 두었다가
다음날 아침 곧장 그 기계로 달려가기 위해서입니다.
전날 아타리가 터지지 않았으니 당연하게도 확률이 높아지는 것.
이른 아침 시간에는 손님을 끌기 위해 확률을 높여 놨다는 소문도
이 부지런한 파친코꾼들을 불러 모으는데 기여를 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파친코가 문을 열면 많은 사람들이 몰려 온다.
개장 초기에는 아타리의 확률이 높을 뿐 아니라 다양한 경품 행사가 있기 때문이다.>
건강한 사회민주주의를 표방하며, 마르크스 근본주의자에서 온건 개혁론자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유한 일본사회당. 그 진보정당의 여성 당수로 1990년대 초반,
전후 일본사회당의 최고 정점을 구사하며 집권까지 이끌어 냈던 도이타카코 전 위원장은
자신이 사회주의 정당의 당수 임에도 불구하고 거리낌 없이 파친코를 즐긴다 말한 적이 있습니다.
사회주의자가 즐기는 자본주의의 시퍼런 꽃, 파친코.
단순 오락거리로 치부했기에 가능했지 그것은 창과 방패, 모순의 극단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부지런함과 근면성으로 포장된 일본의 아침 시간.
그들의 부지런함을 비웃으며 매일 매일긴 줄을 이어 가는 파친코 앞의 행렬과
일본의 대표적 사회주의 정당 지도자가 드나드는 자본주의의 달콤한 혓바닥.
파친코가 사라지지 않는 한 영원히 계속될 이 모순은
현대 일본 사회의 기묘한 싸인, 코싸인 곡선이라 할 것입니다.
파친코는 약 60cm 가량의 수직 판 위에 촘촘한 간격으로 쇠못을 박아 놓은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못을 완전히 박아 놓은 것이 아니라 반쯤 박아 놓아 일종의 길을 만들어 놓은 것인데,
그 사이로 쇠구슬을 튕겨 올려 특정한 구멍 안으로 들어 가게 하면
수십배의 구슬이 되쏟아져 나오도록 한 게임입니다.
1980년대 이후에는 그렇게 구멍에 구슬이 들어갈 때마다 슬롯머쉰 모양의 기계가 작동하도록 하고,
거기에서 똑 같은 숫자가 나란히 맞으면 이른바 '아타리',
더 큰 배당을 하는 방식으로 발전해 오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파친코는 프랑스에서 시작한 코린트 게임(corinth game)을 그 원조로 보고 있습니다.
예전, 쇠못으로 복잡한 길을 만들어 놓은 나무판에 구슬을 쏴 올려 몇 봉지, 몇 봉지하며
번데기를 팔던 우리나라 번데기 장수들의 구슬판을 생각하면 되는 코린트 게임은
유독 일본에서 독특한 문화, 파친코로 성장하게 됩니다.
파친코라는 말은 파친코의 쇠구슬들이 내는 마찰음을
'파치 파치' 혹은 '파칭 파칭'이라 들으며 만들어낸 말이라고 합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우리 주위에서 간혹 볼 수 있는 핀볼 게임의 원형을 코린트 게임으로 보는 것입니다.
일본 문화의 아이콘 파친코와 미국 문화의 상징 핀볼 게임이 같은 출발점을 가지고 있는 셈입니다.
<미국의 술집이나 식당 등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핀볼 게임. 일본의 파친코와 같은 조상을 두고 있다.>
1920년을 전후해 일본에 처음 등장한 파친코는 처음에는 제과점이나 찻집에서
손님들의 심심풀이로 사용되었습니다.
구슬을 많이 넣은 손님에게 과자를 더 준다거나 담배를 주는 방식이었다고 합니다.
이후 파친코는 해를 거듭하며 일정한 시스템을 갖추게 되었고
게임을 통해 얻은 쇠구슬들을 경품으로 바꾸어주며 점차 세력을 넓혀 나갔습니다.
경품도 차츰 발전해 독특한 방식으로 현금을 지급하게 되었는데,
그 독특한 환전 방식이 오늘날 파친코의 성공 요인이 되주었습니다.
<1920년대, 30년대의 파친코 기계. 별도의 파친코 콜렉터들이 있어 비싼 값에 거래되고 있다.>
파친코는 이른바 현금을 돌려주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오락실 공간입니다.
원칙적으로 파친코에서 쇠구슬을 많이 딴 손님에게는
간단한 생활용품으로 구성된 경품만을 지급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실제 일본 파친코에서 쇠구슬을 따게 될 경우 그것을 사각형의 바구니에 담게 되는데,
쇠구슬이 가득 담긴 바구니 하나는 보통 5천엔~7천엔 가량의 가치가 있습니다.
그렇게 따낸 쇠구슬은 원칙적으로 파친코 내에 있는 경품 교환소에 가서 경품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그러나,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그곳에서는 특수 경품이라 부르는 특수한 징표를 줍니다.
보통은 작은 금조각을 넣은 신용카드 크기의 아크릴 카드 같은 것을 주는데, 그것을 가지고
파친코 인근 어딘가에 있는 경품 교환소로 가져 가고 그곳에서 현금으로 교환하게 됩니다.
<파친코 외부의 경품 교환소에서 현금과 교환할 수 있는 특수 경품.
가게와 체인마다 디자인이 다르다.>
눈 가리고 아웅이라고나 할까요? 정식으로 고물상 영업 허가를 내고 경품 교환소를 운영하는 이들은
표면적으로는 인근 파친코에서 특수 경품을 딴 이들에게서 그 특수 경품을 사주는 방식이지만
그렇게 되 산 특수 경품이 다시 파친코로 돌아가 분배될 것이라고는 누가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파친코가 발달하면서 재미있게 일어난 것이 캐릭터 산업의 확장.
많은 종류의 영화, 드라마 등이 파친코용 디자인으로 변형되었다.
'신세기 에반게리온' 파친코 광고 (첫번째), '인디아나 죤스' 파친코 광고(두번째),
한류 드라마 '겨울연가' 파친코 광고와 실물((세번째, 네번째)>
유럽에서 시작한 작은 쇠구슬 놀이판이 연간 400조원대의 산업으로 자라나고,
많게는 3,500만명의 국민이 거기에 매달립니다.
비록 그 안에서 현금이 돌지 않는다고는 해도, 누가 봐도 ‘척’이다 싶은 도박 놀이 임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사람들이 미쳐 있습니다.
근면함을 상징으로 가진 나라에서 요행의 마음으로 아침 줄을 만들어 내고,
저명한 사회주의 정당 지도자조차 거리낌없이 파친코의 재미를 옹호하고 있습니다.
중독성이 있네 없네 논박을 벌여도 해마다 파친코 주차장에서 혼자 차 안에 남겨뒀다
목숨을 잃는 어린아이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기계를 조작하고 유도해 보려는 사기꾼 협잡꾼들의 장난 역시 끊이지 않습니다.
규제는 상상 이상으로 까다롭습니다. 사소한 잘못 하나 용서 하지 않습니다.
설령 기계의 오작동으로 인하였다고해도 조금만 의심이 되는 상황이 발생하면
전 점포가 문을 닫아야 합니다. 심지어 자신이 속한 체인점들 모두가 닫아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파친코는 돌아갑니다.
오늘도 내일도, 수상이 누가 되든, 경제가 어찌 되건, 북조선 납치 문제가 어찌 되건,
파친코는 차르르~ 쏴아~ 쏴아~ 파친파친~ 쇳 소리를 내며 돌아갑니다.
오늘도 그렇게 거침없이 일본 열도를 휘감으며 돌아가는 11mm의 쇠구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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